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미 전쟁 (문단 편집) === 리처드 3세의 찬탈 ===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병사하고 나서 평화롭던 요크 왕가에 그의 형제인 --[[라이온킹]]의 [[스카]] 필나는-- 꼽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온갖 악당짓, [[수양대군]] 짓을 한다는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연극인 《[[리처드 3세(연극)|리처드 3세]]》의 이야기이다. 희곡도 에드워드 4세의 즉위와 함께 시작한다.[* 이에 대해 리처드 3세를 지나치게 추남에 악마화한 것은 내전의 승자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조부인 헨리 튜더, 즉 헨리 7세를 띄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에드워드 4세는 숱한 위기 때마다 자신을 충실히 보좌해준 막내동생 [[리처드 3세|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를 신뢰했고, 죽기 직전 리처드를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자 호국경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어린 에드워드 5세의 친위세력이 될 수 있는 그의 외삼촌이자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동생 앤서니 우드빌, 엘리자베스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호국경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윽고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런던탑에 감금했다. 이후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정당한 결혼이 아니므로 에드워드 5세를 비롯한 두 사람의 자식들은 사생아이며, 자신이야말로 에드워드 4세의 적법한 계승자이자 정당한 왕이라고 선포했다. 그렇게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리처드 3세]]로 즉위했고,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리처드 3세의 찬탈은 기존 요크파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 리처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였던 버킹엄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반란의 생존자들 및 우드빌 가문 등 에드워드 4세의 지지자 상당수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후계자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 어머니 혈통이 랭커스터 가문의 분파인 보퍼트 가문이긴 했지만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던 캐서린 스윈포드와의 사이에서 나온 '''사생아들로 이루어진 집안'''이었다. 나중에 존과 캐서린은 정식 결혼을 했고, 이로써 사생아들도 적자로 취급받게 되었지만 헨리 4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이 박탈되는 등, 정상적으로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다.]와 연합하여 리처드 3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리처드 3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가 사망하면서 요크 왕조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신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조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 한다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는데 리처드 3세의 지지층 이탈만 가속시킬 뿐이었고, 헨리 튜더는 자신이 즉위하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요크 가문을 포용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